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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인문학/문학

피천득 <인연>

by 사마견우 2024.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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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작가가 살아가며 만난 사람들과의 소중한 관계,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애틋한 그리움을 세밀하게 풀어낸 작품입니다. 특히 이 작품에서 중요한 축을 이루는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은 작가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주는 순간들이며, 독자들로 하여금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느끼게 합니다.

첫 번째 만남: 순수하고 애틋한 설렘


첫 번째 만남은 피천득이 열일곱 살 소년 시절 도쿄에서 유학 생활을 할 때 일어납니다. 그는 아사코라는 소녀를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은 피천득의 마음속에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아사코는 웃음이 맑고 순수한 소녀로, 두 사람은 함께 학교를 산책하고 서로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가까워집니다.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자신의 소중한 물건인 운동화를 보여주며, 마치 첫사랑의 풋풋함을 공유하는 듯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피천득은 이 소녀와의 만남을 평생 동안 가슴 속에 간직하며, 그녀가 주는 순수한 감정에 매료됩니다. 아사코는 피천득에게 한없이 순수하고 아련한 존재로 남아 있으며, 첫사랑의 설렘이 그의 인생에서 깊은 기억으로 자리잡습니다.

두 번째 만남: 성숙한 사랑과 지나간 시간


세월이 흘러, 아사코와 피천득은 두 번째 만남을 갖게 됩니다. 어린 소녀였던 아사코는 이제 성숙한 여성이 되었고, 피천득도 서른 즈음의 성인이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십여 년 전 함께 걸었던 성심여학원을 다시 산책하며 옛 추억을 떠올립니다. 이때 피천득은 아사코에게 십여 년 전 그녀가 소중히 여겼던 운동화의 신발장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아사코는 이미 그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었고, 그저 덤덤하게 "지금은 구두를 신고 교실에 들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이 대화는 두 사람의 인연이 세월의 흐름 속에서 변해버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피천득이 간직한 어린 시절의 추억과 감정은 여전히 그에게 특별한 것이었지만, 아사코에게는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잊혀진 과거에 불과했습니다. 이 만남을 통해 피천득은 자신이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추억과 감정이 그녀에게는 달랐음을 깨닫게 됩니다.

세 번째 만남: 이뤄질 수 없는 인연과 후회


마지막 만남은 1954년, 한국전쟁이 끝난 후 피천득이 도쿄를 다시 찾으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피천득이 기대했던 행복한 재회가 아닌, 아사코가 이미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사코는 이제 다른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있으며, 그녀의 남편은 피천득이 바라던 이상적인 남편이 아닌, 미국 점령군 장교입니다. 피천득은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이 아닌, 그저 현실에 적응한 모습에 가슴 아픈 슬픔을 느낍니다.

마지막 만남에서 피천득은 아사코와 악수조차 하지 못하고, 예의를 차려 절을 하며 서로 인사를 나눕니다. 그들은 이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고 있으며, 피천득은 이 세 번째 만남이 오히려 없었어야 좋았을 것이라고 후회합니다. 그는 마지막 만남에서 그저 첫 만남의 순수한 기억 속에 아사코를 간직하고 싶어 했을 것입니다. 피천득은 세 번째 만남을 통해, 인연이란 결국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그가 품어왔던 추억과 이상이 현실에서 어떻게 변해버렸는지를 실감합니다.

인연의 무상함과 잔잔한 여운


피천득의 <인연>은 인연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을 남깁니다. 아사코와의 세 번의 만남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시간이 흘러가면서도 잊히지 않는 감정과 그리움에 대한 탐구입니다. 피천득은 첫사랑의 설렘과 아련함,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변해가는 현실 속에서의 상실감을 잔잔하게 그려냅니다. 그리움 속에서 인연을 떠올리며,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감정의 잔재를 피천득은 섬세하게 풀어냅니다.


이 수필은 짧은 인연이 우리 삶 속에서 얼마나 깊이 자리잡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동시에 그 인연이 어떻게 변해갈 수 있는지도 담담하게 받아들입니다. 피천득의 서정적인 문체와 절제된 감성은 독자들로 하여금 그리움과 추억 속에서 자신의 인연을 떠올리게 하며, 인생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듭니다. <인연>은 한 남자의 가슴 속 깊이 새겨진 사랑과 그리움을 통해,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모든 인연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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