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베블런의 통찰과 오늘날의 한국 사회를 비추다
한 사회에서 진보와 보수의 갈등은 언제나 존재해왔다. 하지만 놀랍게도, 사회구조로 인해 고통받는 계층, 곧 ‘가난한 사람들’이 진보보다 보수적 성향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변화가 곧 생존의 열쇠일 것 같은데도, 왜 그들은 변화를 두려워하고 기존 체제를 더 따르려 하는가?
이 질문에 가장 통찰력 있는 해석을 던진 사람 중 한 명은 바로 소스타인 베블런이다. 그는 경제학자였지만, 인간의 심리와 사회 제도에 깊은 관심을 가진 ‘제도학파’의 사상가로, ‘베블런 효과’로 대표되는 소비에 대한 심리적 통찰 외에도 중요한 사회분석을 남겼다. 그 중 하나가 바로 “가난한 이들이 왜 보수적인가?”에 대한 해석이다.
• 베블런의 분석: 순응은 생존의 조건이다
베블런은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고. 왜냐하면 기존 질서와 관습에 순응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에 있기 때문이다. 변화나 도전은 리스크를 동반하며,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곧 생존의 위협이다.
즉, 보수는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위험 회피 전략’이며, 보수성이란 생존의 방식이다. 시스템을 뒤엎는 변화보다는, 그 안에서 적응하며 최소한의 안정과 보호를 추구하는 쪽이 더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분석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조차 간과했던 부분이다. 그들은 가난한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깨닫고 결국 혁명에 나설 것이라고 보았지만, 베블런은 그럴 여유조차 없는 계층의 현실에 집중했다.
• 현대 사회에의 적용: 보수, 진보, 그리고 리스크 감수성
이 베블런의 통찰은 2020년대의 한국 사회에도 정확히 들어맞는다. 오늘날 가난한 이들, 저학력, 저소득층은 변화보다 ‘현재 유지’를 택한다. 이는 단순한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정보의 비대칭, 사회 변화 속도의 가속화, 교육 격차가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반면, 도시 중산층이나 화이트칼라, 특히 2030 세대 중 고학력자들은 사회 구조의 틈새나 미래 기술의 변화에서 기회를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진보적인 가치를 외치며, 때로는 자신의 계급 이동 가능성을 사회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한다. 여기서 ‘위선자’라는 비난도 따라온다. 결국 진보란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염두에 두는 이들이 추구하는 성향인 셈이다.

• 정치 스펙트럼은 경제만이 아니다
우리가 종종 간과하는 것은, 보수성과 진보성이 경제적, 문화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 중산층은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이다.
• 반대로 저소득층은 경제적으로는 복지를 원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보수적 가치에 익숙하다.
• 상류층은 자유시장과 규제 완화를 원하지만, 사회 규범은 자기 계층에 유리하도록 유지되기를 바란다.
이런 복잡한 층위 속에서 ‘왜 가난한 사람이 보수적인가?’라는 질문은 단순히 ‘모순’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든 생존 전략임을 인정해야 한다.
• 맺음말: 진보와 보수는 ‘삶의 전략’이다
우리는 정치적 성향을 도덕적 잣대나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있다. 진보는 깨어 있고, 보수는 시대착오적이라거나, 보수는 책임 있고, 진보는 몽상적이라는 식의 낙인은 그 자체로 폭력이다.
진보는 변화에 대한 투자이며, 보수는 변화에 대한 보험이다. 누군가는 미래의 가능성에 배팅할 수 있는 자원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내일의 불확실성보다 오늘의 생존을 택할 수밖에 없다.
진보가 세상을 바꾸고자 한다면, 먼저 왜 어떤 사람들은 변화를 두려워하는지에 대한 공감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변화는 가능해진다. 베블런의 냉소적이지만 날카로운 통찰은 여전히 우리에게 많은 것을 묻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보수적인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들어낸 생존 전략이다.”
진보의 언어가 그들을 포용할 수 없다면, 진정한 변화는 요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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