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 병자호란 속 비극의 역사와 현대에 주는 교훈
병자호란(1636-1637)은 조선 역사에 큰 상처를 남긴 전쟁입니다. 약 2개월간의 짧은 전쟁이었지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면서 약 60만 명의 백성이 청나라에 끌려갔고, 그중 50만 명이 여성이었습니다. 이들 여성은 전쟁 후 환국(돌아옴) 문제로 조선 사회에 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청나라는 몸값을 받고 이들을 풀어주었으며, 이를 '속환'이라 했고, 몸값을 '속환가'라 불렀습니다. 평민은 돈이 없어 고위 관료층이나 부유층만이 가족을 속환할 수 있었습니다.
최명길(1586-1647년)은 이 문제에 대해 인조에게 여성들을 귀국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여성들을 모른 척하면 그들의 혼백이 타국의 저승을 떠돈다"며 환국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많은 양반 가문 사람들이 가족을 속환하기 위해 청나라에 갔으며, 만난 가족들이 부둥켜안고 통곡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전했습니다. 그는 돈이 부족해 속환하지 못한 사람들도 차차 시도할 터인데, 만약 이혼을 허락하면 속환을 원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환국한 여성들은 남편에게 버림받고,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으며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장유의 며느리 문제를 계기로, 예조에서는 환국 여성의 이혼 문제를 심사숙고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최명길은 잡혀간 여성들이 모두 몸을 더럽혔다고 일률적으로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인조는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명을 내렸지만, 사대부들은 새로운 결혼을 하거나 다시 합하지 않았습니다.
사관은 환국한 여인들이 본심은 아니었지만 절의를 잃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이는 '화냥년'이라는 비속어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이는 '청나라에 끌려갔다가 돌아온 여성'이라는 의미의 '환향녀'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환향녀'가 낳은 아이를 '호로새끼'라고 비하하기도 했습니다.
인조는 "홍제원의 냇물에서 목욕을 하고 서울로 돌아오면 그 죄를 묻지 않겠다"며 환향녀의 정조를 거론하는 자를 엄벌에 처한다고 했지만, 이들에 대한 핍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환향녀의 남편은 왕명 때문에 이혼은 못했지만, 첩을 두고 아내를 가까이 하지 않았습니다.
전쟁 중 아내와 가족을 보호하지 못하고, 전쟁이 끝난 후 돌아온 아내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은 조선의 남성들. 이들의 무능함은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자주국방의 힘을 길러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이 환속과 관련해 눈에 띄는 인물이 신계영(1577-1669년)입니다. 그는 청나라와 협상하여 600여 명의 속환인을 데려왔고, 임진왜란 때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146인도 데리고 왔습니다.
신계영이 남긴 '탄로가'(歎老歌)는 젊음을 지나 늙음을 탄식하는 내용으로, 그가 겪은 시대의 비극을 반영합니다. 이 시는 수능 문제로도 출제된 바 있으며,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아이 적 늙은이 보고 백발을 비웃더니 / 그동안에 아이들이 나 웃을 줄 어이 알리 / 아이야 웃지 마라 나도 웃던 아이로다 / 사람이 늙은 후에 거울이 원수로다 / 마음이 젊었더니 옛 얼굴만 여겼더니 / 센 머리 씽건 양자 보니 다 죽어야 하이야 // 늙고 병이 드니 백발을 어이 하리 / 소년행락이 어제론 듯 하다마는 / 어디가 이 얼굴 가지고 옛 내로다 하리오".
병자호란의 환향녀 사건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역사적 비극입니다. 당시 여성들이 겪은 고통과 사회적 차별을 기억하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존중받는 사회를 이루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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